바다의 배
‘사람은 이름 따라간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더라. 기억 속을 아무리 헤집어봐도 출처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그럴싸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넘어서 이상하게도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말이다. 대개 사람들과 이름의 뜻을 가지고 이야기하다 보면 ‘아름답다’라거나 ‘지혜롭다’라거나 ‘빼어나다’와 같은 형용사가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름의 뜻처럼 아름답게, 지혜롭게, 빼어나게 살았으면 혹은 아름다운, 지혜로운, 빼어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선명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만 같은 이름들이었다. 물론 내 경험 안에서일 뿐이지만 ‘아름답다’는 뜻의 이름을 지닌 내 동생은 아름다운 것들을 지향하고 예쁘장하며, ‘지혜롭다’는 뜻의 이름을 지닌 내 친구는 자신의 삶을 헤쳐 나가는 모습에서 지혜로움이 묻어나며, ‘빼어나다’는 뜻의 이름을 지닌 내가 좋아하는 뮤지컬 배우는 노래도 연기도 정말 특출나게 잘한다.
바다의 배. 내 이름의 한자를 풀어내면 그저 바다의 배일 뿐이었다. 엄마나 아빠에게 내 이름은 무슨 뜻으로 지은 거냐며 물을 때마다 답이 달라졌다. ‘바다만 있으면 허전한데 배가 있어야지. 배가 바다에서는 아주 중요한 존재야.’라거나 ‘바다에 섬들이 따로 떨어져 있으니까 얼마나 외로워. 배는 그 섬들을 연결하는 존재야.’라거나 ‘때로는 평온하고 때로는 격랑이 이는 바다를 돌아다니려면 현명해야지.’라고. 어떤 뜻풀이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고, 어떤 뜻풀이는 그럴싸해서 좋았지만 ‘그래서 결국 무슨 뜻이라는 거야? 대체 어떻게 살라는 거야?’ 답을 찾지 못한 채 혼란스러움만이 내 안에 가득 남았다. 그래서 사람들과 이름의 뜻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가라앉았던 혼란스러움을 다시 젓는 행위나 다름 없었고, 부옇게 된 머릿속을 헤집으며 겨우 잡아낸 뜻풀이 몇 개를 주섬주섬 내놓으며 대충 얼버무리곤 했다.
바다의 배가 어떤 뜻인지 답을 찾지 못해 혼란스러운 마음을 제외하고는 나는 내 이름이 좋았다. 내 이름이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 내 이름을 구성하고 있는 자음과 모음, 내 이름이 발음되는 방식 그 모두를 좋아했다. 바다 위에 고요히 떠 있는 모습이든 바다를 세차게 가르고 나가는 모습이든 바다 위 배의 이미지는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을 상쾌하게 했고, 여러 상황에서 ‘“제 이름의 해는 여이(ㅖ) 말고 아이(ㅐ)입니다”라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해야 했(서해인, 콘텐츠 만드는 마음)’지만 그것이 마치 내 이름은 흔한 이름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괜히 우쭐해지기도 했고, 황해도 해주가 사실은 내 땅이라는 너스레를 떨거나 내 이름의 발음을 어려워하는 외국인 친구들에게 ‘너 비틀즈 알지? 그럼 ‘Hey Jude’라는 노래 알아? 그 노래를 부르면 내 이름을 쉽게 발음할 수 있어’라며 ‘헤이쥳’하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모아나를 보게 된 것도 평소 내 이름이 연상하게 하는 이미지와 맞닿아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바다가 부르면 운명적 모험이 시작된다!’라는 문구와 함께 투명한 파란색 파도에 둘러싸여 있는 당찬 모아나의 모습에 홀린 듯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풍요로운 모투누이 섬 추장의 딸인 모아나는 차기 추장으로서의 교육을 아버지로부터 철저히 받게 되는데 그 가르침 중 하나는 ‘바다를 멀리하라는 것’이다. (아니… 생각해 보니 추장님이 바다라는 뜻의 모아나라고 이름을 지으셨네요…) 그러나 어릴 적부터 바다에 대한 본능적인 끌림을 가진 모아나는 할머니 탈라로부터 자신의 선조들이 사실은 과거에 항해를 하던 부족이었다는 이야기와 모아나가 바다로부터 선택받은 자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고민 끝에 모아나는 자신이 살고 있는 모투누이 섬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족들과 부족원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우선하며 결국 바다로 나아간다.
바다를 항해하던 부족의 후손이자 바다로부터 선택받은 모아나이지만 항해는 쉽지 않았다. 서툰 항해술만으로 마주한 바다는 거친 풍랑을 선사했다. 표류하게 된 섬에서 만난 반인반수 마우이와 티격태격 동행하다가 위기를 맞이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모아나는 왜 자신이 바다로까지 나왔는지, 바다가 왜 자기를 선택했는지 회의감에 주저앉는다. 그때 영혼이 된 할머니 탈라가 나타나 모아나 스스로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고 마침내 모아나는 외친다.
‘나는 모아나야! (I am Moana.)’
나는 나 자신이라는 이 선언이 내 마음을 쿵 울렸다. 단순히 모아나가 스스로의 이름을 자신 있게 외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모아나가 자신을 모아나라고 외치는 것에는 자신의 뿌리인 항해를 하는 부족으로서의 정체성과 자신의 터전인 모투누이 섬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바다에 이끌리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 그 모두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거친 풍랑을 헤쳐 나가며 그 끝에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모습을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으로 어떻게 나아갈지 선택하는 모아나의 모습처럼 살고 싶어졌다. 이름을 지어준 엄마와 아빠가 내게 지나가듯 이야기한 모든 것들: 바다만 있어서 허전하다면 그 위에 떠올라 중요한 존재가, 외로운 섬들을 연결하는 존재가, 평온하기도 격랑이 이는 바다를 돌아다니는 현명한 존재 가 되어야지. 그리고 주어진 이름을 가지고 사는 나 스스로가 바라는 모든 것들: 때로는 망망대해 위에서 고독을 음미할 줄 아는 존재가, 끝없이 펼쳐진 세상으로 자유롭게 뻗어나가는 존재가, 산을 오르듯 하나의 목표를 찍기 위해 위로 내달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항해하듯 앞으로 펼쳐질 모험을 기대하며 나아가는 마음을 가진 존재가 되어야지.
결국 이름이란 지어준 사람의 바람과 주어진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다짐 그 모든 것으로 이루어진 것임으로 내 이름을 주머니 속 돌처럼 계속해서 만지작거리며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다. 나는 바다 위의 작은 조각배가 될래. 부는 바람을 애써 이기려 하지 않고 몸을 맡기되 바람이 불지 않을 때에는 수행하듯 노를 묵묵히 젓는 그런 존재. 내가 끝내 닿을 곳이 어딘지 몰라도 지금의 항해를 소중한 마음으로 즐길 줄 아는 그런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