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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고 순한 너를 닮은 이야기

“몸의 마음은 말, 말의 마음은 몸, 마음의 몸은 말, 몸의 마음은 말, 말의 마음은 몸, 마음의 몸은 말…”

한 남자의 알 수 없는 중얼거림으로 시작하는 다소 이상한 극이었다. 이 극의 주인공의 이름은 ‘고요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온 요한은 자신이 말을 하게 되면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 될까봐 말을 하지 않는다. 혹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랩처럼 보이는 저 중얼거림은 아주 유창하게 해내지만 요한이 실제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되뇌는 것이기 때문이고, 실제 요한이 말을 해야할 때에는 심하게 버벅이는 바람에 말을 건 상대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해 버리고는 한다.

요한은 상처가 난 곳이 아물면서 그 자리에 풀이 돋는 이상한 사람이기도 하다. 몸 곳곳에 풀이 돋던 어느 날, 요한의 앞에 수상한 친구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한다. 요한이 채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던 4살이었던 요한의 형, 요한이 어릴 때 잠시 자리를 떴다는 이유로 결국 죽게 되었던 다친 검은 새, 정품은 아니었지만 가난했던 요한이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장난감이라 헤질 때까지 함께했던 후레쉬맨, 그리고 요한이 감옥에 오게 된 이유가 되기도 한 버려진 칼까지. 이 수상하고 다소 부산스럽고 시끄러운 친구들은 요한의 눈에만 보인다. 이 친구들과 작은 감옥방에서 복닥이던 요한은 사면을 받게 되고, 감옥에 있는 내내 그리워하던 딸 미리를 찾아 여정을 떠난다.

그 여정에 갑자기 들이닥친 중학생 새봄. 당당하게 자신을 유괴해달라는 이 소녀는 병원에서 도망치는 길이다. 무리를 하면 픽 쓰러지기 일쑤인 약한 소녀이지만 자신에게 빚독촉을 하는 사채업자들 앞에서 배짱 있게 나서는 강한 소녀이기도 하다. 새봄은 자신이 미리의 유일한 친구였다고 요한에게 이야기하며, 자신의 빚을 갚아달라고 그리고 자신을 유괴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면 미리를 찾게 해주겠다고.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 앞에서 요한이 새봄이 원하는대로 해준 것은 새봄 또한 요한처럼 상처가 아문 자리에 풀이 돋는 소녀였기 때문이었을까.

미리를 찾아 기나긴 여정을 떠난 요한과 새봄, 그리고 수상한 친구들까지. 우당탕탕 이상한 여정 끝에 발견된 것은 결국 요한에게만 보이는 수상한 친구들처럼 미리도 요한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새봄의 눈에만 보이는 상태로 계속해서 동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요한 미행은 고요한이 미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고요한을 미행하는 미리의 이야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요한이 미리를 만나고 나서 요한의 수상한 친구들은 이제 떠나갈 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미리도 함께. 요한과 새봄은 사는 데까지 살아보자며 손을 맞잡고 삶의 긴 여정을 걷기 시작한다. 요한과 새봄의 상처에 돋았던 푸른 풀의 생명력처럼 질기고도 싱그럽고도 무성할 삶의 여정이 오래오래 이어지길 바랐다.

이상하기도 하고 슴슴하기도 한 이 이야기를 보고는 눈물이 계속해서 흘렀다. 이토록 유쾌하게 슬프고 찬란하게 아름다운 애도가 또 있을까 싶어서. 요한의 눈 앞에 나타난 형, 검은 새, 후레쉬맨, 칼은 요한이 얼마나 선하고 순한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요한은 형이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음에도 형의 묘에 가서 미안하다고 우는 아이였다. 요한은 다친 검은 새를 어떻게 해서든 구해주려고 노력을 했는데, 잠시 자리를 뜬 사이 짓궂은 친구가 결국 죽여버린 검은 새를 마주하고는 슬퍼하면서 땅에 고이 묻어주는 아이였다. 요한은 라디오가 달려있는 후레쉬맨이 다른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정품 후레쉬맨과 다름을 알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이자 갖고 싶었던 장난감이었으므로 가품 후레쉬맨일지라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아이였다. 요한은 검은 봉투 속에 든 피 묻은 칼을 집어들어 범인으로 몰린 끝에 무고하게 감옥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실제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고나서도 그 사람을 원망하고 탓하기 보다는 그 사람이 자수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여생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를 이해해보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잊혀져 가는 것들, 부서지는 것들,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 버려지는 것들, 사소한 것들을 귀하고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았던 요한. 이런 요한이었기에 그 존재들이 다정한 마음을 품고 요한을 찾아와 요한의 여정을 도와준 것이겠지. 요한이 지나간 시간과 기억들을, 소중한 사람을 충분히 애도하고 떠나보낼 수 있도록. 그래서 그 끝에는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보자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바보스러울만큼 선하고 순한 요한이 그저 마지막까지 살아내기를, 조금 더 욕심을 보태 요한이 행복해 지기만을 바라게 되는 이야기였다.

연극을 보고 나오는 길에, 이 이야기를 내게 꼭 보여주고 싶다던 아이가 작년 연말 쯤 내게 건넸던 편지에 써준 글귀가 떠올랐다. ‘선한 사람들이 점점 바보 취급을 받는 세상에서 언니처럼 선한 사람들이 끝까지 웃고 마지막까지 행복하길 매번 바라.‘ 요한이만큼이나 새봄이만큼이나 선하고 순한 그 아이의 말간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이 이야기가 얼마나 너와 닮아있는지를 직접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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