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ehographer

너의 느낌표를 믿어

2015년 7월의 여름날이었다. 스페인의 ZARA였는지 H&M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한 스파 브랜드 탈의실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쇼핑을 그렇게 좋아하고 즐겨하는 편이 아니라 보통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매장에 가서, 옷을 입어보고 핏에 큰 문제가 없으면 바로 구매를 하는 편인 내게는 탈의실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는 것이 예외적인 일이었다. 사방이 하얀 박스 같은 탈의실 안에서 나는 거울 속 낯선 나 자신과 이 안에서 어떻게 해서든 친해지겠다는 듯 애써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옷을 억지로 사야만 하는 상황이었냐고? 전혀. 기나긴 배낭여행의 첫 달이었기에 경제적으로도 최대한 절약 모드였고, 배낭의 무게를 늘릴 수 없었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렇게 오래 탈의실에 있던 건 입었던 옷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 아니, 그럼 사면 되잖아?

하얀색 바탕에 초록색 나뭇잎들이 시원하게 그려진 민소매 점프수트. 거의 노려보다시피 바라보던 거울 속 내가 입고 있던 옷이다. 패턴과 디자인도 햇볕이 강렬하게 내려쬐는 스페인의 여름날에 너무나 잘 어울릴 뿐만 아니라 소재도 하늘하늘해서 착용감도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이런 옷을 살면서 입어볼 것이라고 생각조차 못했던 것에 있었다. 거울 속 내 모습이 어색하지만 그래도 꽤나 마음에 들기도 했는데, 이 모습으로 세상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옷을 입고 탈의실 밖을 나서지 못하겠는 이유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이런 점프수트를 입기에 나는 너무 뚱뚱해. 특히 이 팔뚝살… 민소매를 어떻게 입어.‘ ’점프수트… 불편하지 않을까? 그리고 몸이 너무 통짜로 보이지 않을까… 더군다나 나는 키도 작은데…‘ ’흰색 옷 관리를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아무데나 턱턱 앉고, 부주의하게 뭔가를 흘릴 것만 같아.‘

결국 거울 속 내 모습을 핸드폰 사진으로 담아내고서야 탈의실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그런 10년 전의 나를 떠올릴 때마다 ‘잉 바보야! 그냥 사도 되는데! 충분히 예쁘고 잘 어울려.’라고 미래의 내가 이야기해주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하곤 한다. 어쩐지 인터스텔라에서 우주 공간 책장 너머에서 과거의 나를 보며 어떻게 해서든 신호를 보내려는 주인공의 심정을 이해할 것만 같다(사실 그의 상황이 더욱 심각하긴 해서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뮤지컬 <라흐헤스트>를 보면서 이때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첫 번째 남편 이상과의 시간을 살아내며 일기를 차곡히 쌓아가는, 어떻게 보면 과거의 나를 의미하는 변동림이 두 번째 남편 김환기를 떠나보내고 일기장을 통해 지난 시간을 반추하는, 현재 혹은 미래의 나를 의미하는 김향안이 교차하며 서로에게 단단한 응원과 따뜻한 위로를 전하기 때문이었다. 시인 이상에 대한 마음이 커져가지만 예술가를 만나는 것이 괜찮을지 걱정하고 망설이는 동림에게 미래에 12시간 기차를 타고, 8시간 연락선을 타고, 다시 12시간 기차를 타더라도 그를 만나러 가게 될 거라고 그저 아낌없이 지금 이 순간 힘껏 마음 가는대로 사랑하라고 향안이 힘을 실어주는 모습이 특히 2015년 7월 여름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의 내게 지금의 내가 힘을 실어주었으면 어땠을까.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힘껏 확신을 주었으면 좋았을 순간들이 극을 보는 내내 하나둘 떠올랐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극을 보고 나오는 길부터 지금까지는 뭔가 역전된 느낌이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내게 힘을 실어주고 있구나 싶다. 내 마음가는대로 선택하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던 과거의 내가 탈의실에서 한참 고민했던 그 시간 덕분에, 그 이후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진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면서 조금씩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하는 내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런 내가 될 수 있도록 해준 과거의 내가 참 고맙다.

특히 이전과는 또 다른 환경에서 이질적인 사람들과 일하면서 위축되는 요즘의 내게 과거의 내가 열심히 소리치고 있음을 어렴풋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과거의 시간들을 지나오면서 배웠잖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바라보든 네가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고 걸음을 옮겨도 된다는 것을! 너부터가 너 스스로를 믿어주지 않으면 누가 너를 믿겠어. 괜찮아, 지금의 너를 힘껏 믿어줘!’

<라흐헤스트>의 마지막 무렵, 향안은 망설이던 동림에게 늘 힘과 용기를 주던 초반과는 달리 되레 망설이는 모습으로 선다. 향안의 삶 속에 또 다시 들어오고자 하는 아티스트 환기. 그에게 마음이 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으면서도 과거 아티스트인 이상을 사랑하면서 그리고 그를 잃으면서 많이 울고 힘들어하던 동림 앞에서 향안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묻는다. ‘내가 다시 아티스트를 사랑해도 괜찮을까?’ 직전 장면까지 상의 유골함을 꼭 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동림은 그 어느때보다 단단하고 다정한 눈빛으로 향안을 바라본다. 그리고 말한다. ‘Les gens partent mais l’art reste(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아), 너의 느낌표를 믿어!’

오늘도 나는 과거의 내가 보내는 단단하고 다정한 눈빛에 등 떠밀려, 미래의 내가 힘껏 불어넣어주는 용기와 확신의 손에 이끌려 하루를 또 살아가본다. 나만의 느낌표를 믿으며 나만의 빛깔로 그림을 그려내고, 나만의 글자로 시를 써내려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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