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받지 못한 손님과 환대
불청객(不請客)이라는 단어를 볼 때 불편함, 언짢음, 아니꼬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연관된 단어를 떠올려왔던 것은 어쩌면 나를 그 단어로 설명하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라고 청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찾아온 손님이라는 뜻의 불청객이라는 단어를 오늘 내내 마음 속에서 만지작 만지작 거렸다.
지난 12월부터 국제 컨퍼런스를 준비하는 팀에서 일했다. 이전에도 일을 하면서 포럼, 콜로키움, 컨퍼런스 등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해보기는 했으나 이렇게 큰 규모의 국제적인 컨퍼런스는 처음이었다. 새로운 분야의 일을 배운다는 생각으로 차근차근 일을 했고, 다행히 함께했던 팀원들이 배울 점도 많고 좋은 사람들이었기에 꽤나 즐겁게 일을 해나갔다. 모든 조직이 완벽할 수는 없기에 이 조직이 가지고 있는 아쉬운 부분들도 분명 있었다. 아쉬운 부분이라하면 이 행사가 워낙 큰 행사다보니 이해관계자가 상당히 많았고, 그 관계가 매우 복잡하게 얽히고 섥혀 있었다는 것이었는데 그 부분이 내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감수해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저 내가 맡은 일을 착실히 해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마음이 안일했던 걸까? 나에게로부터 멀리 있어서 미세하게만 보이던 균열들과 아주 작은 소리로 들리던 파열음들이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3월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 덧 심한 균열로 생긴 틈에 여러 번 발이 빠지지 않도록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고, 이어진 4월 귓전에 아주 크게 울리는 파열음에 괴로워하며 심지어는 그 파열이 일으킨 충격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기도 했다.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일을 그만두었다. 내 인생 처음으로 시작한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도중에 그만둔 경험이기도 했다.
4개월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준비하던 행사의 개막일이 바로 2025년 5월 21일 오늘이었고, 나는 이 행사의 불청객이었다. 사실 행사장에 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와 커뮤니케이션하던 연사들을 실제로 만나면 어떨지, 내가 기획에 참여한 세션이 어떻게 진행이 될 지 궁금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보다는 내가 다시 한번 다치고 싶지는 않았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기꺼이 여기지 않을 것이 뻔한데, 감정을 소모하면서까지 그곳에 갈 가치가 있을까? 그래서 함께 그만둔 팀장님이 출입 등록은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라며 함께 행사장에 가자고 할 때에도 솔직히 떨떠름한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내가 행사장에 가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메일과 전화로만 커뮤니케이션하던 연사들의 얼굴을 보며 인사를 나누고 싶다는 마음과 팀장님과의 관계를 망치고는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컨퍼런스 드레스코드에 맞추어 셋업을 입고 호텔로 향했다. 갑작스레 습해진 날씨에 땀이 나기 시작해서 조금씩 불쾌함이 올라올 쯤 호텔 로비에 도착했다. 호텔 로비의 서늘하고 쾌적한 공기가 불쾌함을 금세 식혀주었다. 꽤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로비의 소음도 산뜻하게 느껴졌다. 팀장님은 출입 등록이 확인되기 전까지 일단 호텔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 한 잔을 하자고 했다. 창가 자리를 요청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는 호텔 로비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다른 카페의 4배 정도 되는 가격의 커피를 홀짝이며 그동안의 근황을 나누었다. 아직 조직에 남아있는 동료가 우리를 찾아와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호텔 카페에 있는데 시간이 되면 잠시 인사 드리고 싶다고 내가 담당했던 몇 분의 연사분들께 연락을 드리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출입 등록이 되기를 기다렸지만, 팀장님의 생각과는 달리 출입 등록은 쉽지 않았다. 사실 나는 조직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기꺼워하리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행사장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별스럽지 않아 했다. 그저 쾌적한 호텔 카페에서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좋기만 했다. 우리가 앉아있는 자리로 전년도 행사를 함께 했다던 대행사 직원들이 팀장님을 찾아오기 전까지는.
"아이고... 행사장에 못 들어가고 있는 거예요? 짠해서 어떡해..."
처음에는 어차피 큰 기대 없이 왔기에 그 말이 대수롭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이 마음 어딘가에 바늘을 찌른 것처럼 작은 구멍을 냈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짠하고 딱해보이는 구나.' '초대 받지 않은 행사에 막무가내로 온 사람들처럼 비춰지겠구나.' 바닥을 드러낸 커피잔을 만지작 거리며 마음 속 구멍 역시 만지작 거렸다. 그렇게 점차 구멍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때, 담당 연사 중 한 분이었던 J에게 답장이 왔다.
'It would be great to see you today. Give me ten minutes and I can come down and meet you.'
10분 뒤 호텔 로비에서 J를 만났다. 사실 답장을 받고 J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먼저 연락을 한 것이기는 한데 막상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 지 막막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막상 프로필 사진과 줌콜로 보던 얼굴을 직접 마주하니 막막함 뒤에 숨어있던 반가움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연락이 닿아서 다행이라는 인사를 나누며 J와 호텔 카페에 마주앉았다. 커피를 주문하고 행사 참여 관련해서 어땠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막막함이 다시 치고 올라오려는 찰나, J가 물었다. 일을 그만두고 어떻게 지내냐고.
불쑥 진심이 올라왔다. 사실 잘 지내지 못하고 있다고. 조직 내 갈등이 있었고 그로 인해 상황이 내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서 조직을 좋게 그만둔 것이 아니었다고. 커리어에 대해서 고민이 많아졌고 방황하고 있다고.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J가 말했다. 조직에서는 종종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고, 커리어에 대해서 계속해서 고민하는 것이 꼭 방황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가만하게 담담하게 위로에 이어 J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일을 했었는지를 조금 더 상세하게 이야기를 해준다면 자신이 같이 고민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지금 있는 조직에서 꽤나 오래 있었고, 그러다보니 직원을 채용하고 교육하는 일과 관련된 경험이 있다고.
그리고 이어진 시간은 정말… 개인 커리어 상담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나의 일 경험과 고민을 듣고, 자신의 일 경험을 나눠주면서 방향성을 잘 고민해보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고민에 도움이 될만한 자신의 커리어를 정리한 자료를 직접 보여주기도 했고, 조직 내 신입 직원들을 위한 교육 자료까지 내게 선뜻 메일로 발송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이야기 나눴을까? 문득 머쓱해졌다. 내가 서포트와 케어를 해야 하는 연사였는데, 그런 사람으로부터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더 큰 서포트와 케어를 받아도 되는 걸까?
J에게 민망한 얼굴로 그렇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한국에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속담이 있어요. 사실 제가 J를 서포트해야 하는 역할인데, 오히려 J에게 엄청난 서포트를 받고 있네요.’
J가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정말 기뻐요. 덕분에 이렇게 한국에, 좋은 컨퍼런스 자리에 올 수 있었는데 말이에요. 이렇게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것도 좋았고요.’
J와의 시간은 내게 환대와도 같았다. 나를 반갑게 맞아주고 후하게 대접해준 J 덕분에 나는 더 이상 불청객이 아니게 되었다. 마음에 난 구멍이 더 커지기 전 그 자리에 반창고를 붙여준 J가 한없이 고마웠다. 덕분에 불편했던 감정들을 마주하고 이렇게 글로 풀어낼 수 있게 되었고, 미완이라 생각해 찜찜하게 남을 수 있던 행사에 나만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