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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점 잡기

“제가 퇴사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회사에서 알아줬으면 했던 것 같아요. 내가 조직에 이렇게나 진심이고 열심인 것을 인정해 줬으면 했나 봐요. 경제적인 보상이든 직책 같은 권한적인 측면이든요.”

“보통 직장인들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고민들을 하게 돼. 주로 3년 차, 6년 차… 그쯤에. 그래서 규모가 큰 회사들에는 그 시기에 맞춰서 승진 시스템을 두지. 직원이 이런저런 고민이 생길 때쯤에 연봉도 직책도 올려주면서 붙들어 놓는 거야.”

”그러니까요… 사실 정말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회사에서 저에게 요구하는 역할이나 책임은 점차 커지는데, 그에 비해 제가 받는 보상이 작게 느껴졌어요. 제가 원래 돈 얘기 꺼내는 걸 잘 못하는데… 그래도 퇴사하기 한 2-3년 전부터 연봉 협상 때마다 연봉 수준이 아쉽다고 말씀드리기 시작한 것 같아요. 퇴사하던 해에도 그랬는데, 실제로 일정 부분 반영해 주시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성에 차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 그리고 팀장이란 직책에 욕심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팀원이 팀장이 되었을 때 뭐랄까…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그분이 팀장의 자질이 없다는 것은 전혀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만약 제게 팀장직에 대한 제안이 왔어도 되게 부담스러웠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뭐랄까… 저의 그동안의 노고들을 회사에서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와… 그런데 저 누구 앞에서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연봉, 인정, 보상과 같은 것들에 대해 말한 게 처음인 것 같아요.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나… 싶네요.“

4월의 마지막 날에 함께 일했던 전 직장의 팀장님과 사수님을 만났다. 이렇게 셋의 조합으로 만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는데, 이 두 분은 나를 대학생 프로그램 참여자 그리고 인턴 때부터 보아오셨던 분들이다. 사회생활에 막 발을 들일 때의 나를 보셨던 분들이라 조심스러울 법도 했는데, 나도 모르게 아니 나도 모르고 있던 혹은 모르고 싶었던 마음이 술술 나왔다. 말을 다 해놓고 나서 머쓱하게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고 갸웃거리는 내게 팀장님이 말씀하셨다.

“그러게, 정말 솔직한 이야기다 싶네. 예전에 봐왔던 너와는 또 다른 모습이고.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고민하면서 잘 가고 있다는 느낌이라 오히려 좋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꽤나 신경 쓰는 사람인 나로서는 소위 속물적인 생각을 이렇게나 와르르 털어놓았다는 것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데 묘하게 한편으로는 개운한 느낌이기도 했다. 그 개운함에는 신뢰와 기대가 바탕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도 지금의 이 말로만 나를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 나의 맥락과 입체성을 놓치지 않고 읽어줄 것이라는 기대. 사실은 내가 나 스스로에게 주었어야 하는 것들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기울이는 데에 보탬이 되고 싶어하는 나와 내가 하는 일들을 통해 인정 받고 싶고 때로는 과분할 정도로 보상 받고 싶어하는 나는 충분히 공존할 수 있는데. 여전히 가치를 지향하는 삶에 헌신 혹은 희생을 결부 시키고, 명예나 부를 지향하는 삶을 다소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나 스스로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얼마 전 동생과 기버(Giver)와 테이커(Taker), 매처(Matcher)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떠올랐다.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이 일상을 얼마나 수월하게 하는지, 그래서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이야기하다가 나온 개념이었다. 동생은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주는 만큼 받아야 직성이 풀렸던 여러 상황들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매처라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줄 때는 물론 무언가를 받기를 원해서 준다기 보다 상대를 위하는 마음으로 준 것이지만, 내가 준 것에 대해 상대가 알아주고 고마워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이마저도 상대로부터 무언가를 받고자 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 후로는 그 받고자 하는 마음을 상대에게 직접 표현했고, 그에 따라오는 다정한 말들이 있으니 주고자 하는 마음이 더더욱 커졌다고 했다. 이전에는 마음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속으로 알아주겠거니, 표현해주겠거니 하며 동동 거리다가 끝내 돌려받지 못하면 심술이 났는데 이제는 그냥 먼저 가볍게 툭 '좋지? 고맙지? 헤헤' 해버리니 상대도 웃으며 자신이 원하던 것을 내어주더라는 이야기를 하며 동생은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쩌면 주는 것이 무조건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버를 이타적이고 좋은 그래서 내가 지향해야 하는 인물상이라고 설정해두었던 것 같다. '주었으면 그만이지'라는 말로 사실은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고맙다는 말을 들었으면 하는 마음도, 물질적 혹은 경제적인 보상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도 모두 슬쩍 덮어두며 외면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지향하는 나를 좇느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잘 알아주지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영점을 다시 잡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renavigate #year-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