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ehographer

잠의 늪

항로를 재탐색 중입니다

깊은 여름잠에 빠져들었던 것은 대학생으로서 처음 맞이하는 여름방학 때였다. 룸메이트와 쉐어하던 사근동의 원룸 자취방에서 천장의 무늬가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하염없이 자고 또 잤다. 잠깐 일어나 밥이나 먹었을까? 그마저 기억이 나지 않을만큼 자취방은 내게 잠의 늪이나 다름없었다.

불과 1주일, 아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달뜬 마음으로 이리저리 종종 거리며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던 나와 하염없이 여름잠에 빠져든 나는 내가 보기에도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기에 어려울 정도로 다른 사람 같았다. 대학교에서 보낸 첫 학기는 주로 같은 반 친구들과만 어울려 놀던 고등학생 때와는 달리 성별도 연령도 다양한 사람들을 새롭게 만날 수 있어서 매일이 신선했고,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왔다는 벅참만으로도 하루하루가 짜릿했다. 그렇게 매순간 너무 달뜨게 보낸 탓이었을까? 완전히 방전되어버린 기계처럼 한참을 충전해도 나를 재가동 시키기가 어려웠다.

요즘 내 머릿속에 자주 그때의 장면이 재생된다. 둘이 살기에 넓지 않던, 그래서 침대나 책상 같은 가구는 최소화해서 이불을 펴두면 어쩐지 휑뎅그레하던, 어쩐지 눈을 겨우 뜨던 때에는 한낮에도 체감되던 조도가 그리 높지 않던, 포근하다기에는 숨이 막히기 직전까지는 아니지만 나를 꽈악 틀어죄던 높은 밀도를 가졌던 그 공간에서 계속해서 잠만 잘 수밖에 없던 스무살의 나를 담은 장면.

그때의 장면만큼 선명하지는 않지만, 다른 장면들도 흐릿하게 깜박깜박 존재감을 드러내려고도 한다. 대학교 2학년까지 마치고는 도저히 학교를 더 다니기가 힘들다는 말은 못하고 교환학생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본가에 내려가 웅크리고 있던 나날들. 복학 전 동생의 대학이 결정되기 전까지 3만원을 추가하여 얻은 48만원짜리 고시원에서 난방이 잘 되지 않아서 다이소에서 산 전자레인지용 핫팩을 끌어안고 눈물 흘렸던 날.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회피하듯 떠난 배낭여행에서 집 떠나온 시간은 길어지는데 갑자기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지 불안해지면서 각국의 음식을 잘 경험하느라 포동해진 스스로의 외양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 당시 동행 중이던 ㅈ오빠에게 짜증을 부리며 울었던 날. 배낭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학교를 다니며 취업 준비를 해야하는데 모든 게 막막한데다가 사랑마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어룽어룽 눈물을 매달고 살곶이 다리를 건너던 나날들. 취업을 했는데 내가 1인분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회사와 집만 왕복하며 퇴근하는 길에 편의점에서 잔뜩 사온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왕창 먹고 그런 스스로를 미워하던 나날들. 일터에도 나름 적응을 하고 본격적으로 혼자서도 잘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던 찰나 코로나가 터져서 내가 맡기로 했던 사업이 모두 홀드가 되고 집밖으로도 나갈 수 없던 시기에 그저 아득하게 가라앉던 나날들… 이외에도 기억하지 못하는 비슷한 장면들이 많겠지.

모두 지금 이 순간과 꼭 닮아있는 장면들이다. 요즘의 나는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한다. 전날 아무리 일찍 자더라도, 아침에 슬쩍 눈이 떠지더라도, 요란스럽게 알람이 울리더라도 다시금 이불 속으로 꾸물거리며 들어간다. 더이상 자기는 어렵다 싶을 때에야 꾸무적거리며 침대 밖으로 나와 밀린 집안일을 하나둘 한다. 그렇게 하루가 꿈벅 지나간다.

지금과 닮아있는 과거의 모든 장면들이 그러했듯, 지금 이 순간의 장면도 지나갈 것임을 안다. 한창 바쁘게 살게 될 때를 언젠가 맞이한다면 ‘그때 좀 그냥 맘편히 푹 쉴 걸…‘ 하겠지만서도 마음이 계속해서 소란스럽다. 깊은 잠이 필요했던 때라면 잠이라도 푹 잘 수 있도록 소란스러운 마음을 내 안에 담아두지 않고 글로 풀어내버려야지. 글로 풀어내다보면 언젠가 가뿐하게 아침을 맞이하게 되는 날도 다시금 찾아 오겠지.

#renavigate #year-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