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당장 그만두라고 얘기했다
조급함과 불안함을 다독여주는 엄마 손은 약손
주말에 지방에 사는 엄마가 올라왔다. 함께 공연을 보기로 했는데, 그 핑계로 숙소도 잡아서 1박 2일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엄마를 만나러 터미널로 향하는 발걸음이 설레면서도 어색했다. 엄마와의 사이는 좋은 편이지만 단둘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흔치 않기 때문. 성향과 취향이 잘 맞는 엄마와 동생이 자주 함께할 때 가끔 나도 슬쩍 끼었던 경우가 대다수였다. 작년에 엄마랑 나랑 함께 좋아하고 응원하는 팀이 생겼는데, 그 팀의 공연을 보러 갈 때마다 '엄마도 이 공연 보면 정말 좋아할 텐데...'라는 마음을 핑계 삼아 엄마와 단둘이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어본 거다.
연말연초 이후 두 달 여 만에 보는 거라 자연스레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는 약 3-4년 전 면 단위의 마을로 이사한 이후 다함께돌봄센터의 일과 마을 활동을 병행하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그 일들로 바빴다. 다함께돌봄센터에서 올 한 해 함께할 아이들이 몇 명이고 이 친구들을 위해서 어떤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있는지, 마을에서 새롭게 시작하려고 하는 사업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고민이 있었고 그렇지만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났는지 엄마는 활기차게 이야기를 했다. 반면 나는 '그냥... 지금 맡고 있는 프로젝트는 곧 마무리될 거고, 이제 막 시작하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어서 아직은 크게 안 바빠.'라고 다소 건조하게 말했다. 오히려 근황 얘기보다 오늘의 공연이 얼마나 기대가 되는지, 우리가 함께 응원하는 팀 멤버의 실력이 얼마나 일취월장했는지, 그 팀 덕분에 요즘 얼마나 행복한 지를 계속 얘기했다.
미리 찾아둔 스시집에서 생각보다 더 맛있었던 점심을 먹고 슬렁슬렁 공연장으로 향하는 길에도 했던 얘기를 계속해서 반복 또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좋아하는 팀과 즐거운 공연 이야기 속에 묻어둔 이야기가 툭 튀어나왔다.
'엄마, 나 이 회사에서만 벌써 7년 차다? 이번 달까지 하면 만 6년이더라고. 회사에서 나 보고 경력도 그렇고 능력도 그렇고 팀장 해도 될 때라고 얘기하면서도 결국 팀장은 다른 사람 시켰다? 그게 뭔가 약간 계속 마음에 걸려서 나 팀장 하고 싶었나 싶기도 했는데 그건 아니더라고. 그냥 나한테 물어봤어도 나는 거절했을 것 같은데, 거절할 수도 없었던 게 조금 서러웠나 봐. 오히려 저렇게 구구절절 얘기는 해놓고 직책은 안 주고, 근데 선임이라는 회사에서 통용되지 않는 타이틀 붙여주면서 팀장이 해야 할 법한 일들이나 역할을 나한테 기대하더라고. 그렇다고 내가 일하는 만큼, 내게 주려는 역할만큼 충분한 보상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게 너무 싫었어.'
'... 사람 귀한 줄을 모르네 회사가. 첫 회사에 오래 있으면서 적은 보상에도 자기 일처럼 하는 거 쉬운 거 아닌데. 거기 당장 그만둬라. 너무 오래 다녔다 회사를.'
넋두리하듯 중얼중얼 늘어놓은 이야기에 이어진 엄마의 말. 그 말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쩌면 엄마에게 무심한 척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속으로는 긴장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이 서른 넘어서 철없는 소리 한다고 할까 봐. 한창 커리어 쌓아나갈 시기에 나약한 소리 한다고 할까 봐. 그런데 내가 너무나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회사가, 아니 나 스스로부터가 나를 귀하게 대하지 못하고 있던 것을 누구보다도 나를 소중하게 여길 엄마에게 들켜서 부끄러웠기 때문일까? 안도감과 부끄러움과 서러움이 마구 뒤섞인 눈물이 퐁퐁 솟았다. 묻어두었던 이야기들도 하나둘 계속해서 이어졌다.
내 얘기를 한참 듣던 엄마는 얘기했다.
'1년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푹 쉬어. 쉬면서 하고 싶었던 것들도 다 하고, 뭘 하고 싶은지도 조금씩 생각해 보고. 그러고 나서 한 2-3년 정도는 공부를 더 해도 좋을 것 같아. 앞으로도 지금의 회사를 다니면 지금까지 네가 쌓아온 커리어로만 계속 밀고 나가야 해. 지금 한 텀 쉬면서 조금 더 내실 다져서 나아간다고 생각하면 2-3년은 낭비가 아니야.'
어릴 때 나는 자주 배앓이를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엄마 손은 약손'을 흥얼거리며 내 배에 손을 얹고 따스하고 다정하게 쓸어내려주곤 했다. 엄마의 다정하고도 단단한 말이 약손이 되어 한없이 조급하고 불안하던 내 마음을 쓸어내려줬다. 어린아이일 때나 다 큰 성인이 된 지금이나 엄마는 여전히 든든한 내 뒷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