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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양과 불허복제

안국역 밖으로 나오자 쨍한 햇볕이 눈을 시리게 하기도 전에 열기가 훅 끼쳐왔다. 토요일 오후 시간, 밝은 날씨만큼 달뜬 얼굴을 한 수많은 사람들을 지나 서울공예박물관에 도착했다. 서울공예박물관 주변을 지나갈 때마다 이 공간을 바라보며 서울 한 가운데에 이렇게 탁 트인 공간이 있다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로 신기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안도감을 준다. 돈과 자본, 경쟁과 같은 것들이 아닌 문화예술, 여유와 쉼 같은 것들에 허용되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주는 감각이랄까.

안도감을 주는 박물관 앞에서 안도감을 주는 얼굴들을 만났다. 나를 쓰는 전시 명상의 두 이끔이인 아라님과 연화님.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자 쾌적한 실내 공기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복잡한 서울을 뚫고 오는 다른 멤버들을 기다리는 동안 먼저 도착한 멤버들과 함께 1층에 마련된 등 전시를 둘러보았다. 사실 이날은 내 본진의 막공날이라 마음이 소란하기 그지 없었는데, 은은한 불빛을 한지를 통해 투과해내는 등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차츰 차분해졌다. 모든 멤버가 모이고 연화님이 초대장을 나눠주시며 공예박물관에서의 전시명상이 시작되었다.

연화님의 안내와 함께 서울공예박물관을 둘러보았다. 향로와 종처럼 금속으로 만들어진 공예품, 지난 전시명상 때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보았지만 전시 구성이 달라서 또 새롭게 보였던 청자, 각 분야의 장인들이 모여 재현해낸 오색찬란함. 조선시대 공장제(工匠制)를 중심으로 제작되었던 정돈된 공예품들과 왕조가 지고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사장(私匠)들을 중심으로 제작되었던 다채로운 공예품들을 살펴보았다. 연화님의 안내가 끝나고 자유시간을 부여받았을 때, 짧은 시간 안에 너무나 많은 공예품들이 내 눈과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와 있던 터라 대체 뭐부터 어떻게 봐야할지 정하지 못해 다소 어벙하게 서있었다.

그러다 문득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까워 가장 마지막에 둘러보았던 일제강점기 시대의 공예품을 다룬 ‘장인, 세상을 이롭게 하다’ 섹션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멍한 상태로 공예품들을 하나둘 보다가 한 영상 앞에 멈춰섰다. 유리 넘어 전시된 공예품들을 한층 가까이에서,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주기 위해 제작된 영상이었다. 선명하고 감각적인 영상을 들여다보던 중 부채에 새겨진 ‘불허복제(不許複製)’라는 단어를 마주했다. ‘베끼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뜻인 건데, 앞서 연화님의 설명 중에서 조선시대에는 공예품을 제작할 때 본이 되는 ‘견양(見樣)’이 떠오르며 그 대비가 흥미롭게 다가왔다.

견양과 불허복제. 어쩌면 오늘날은 그 둘 사이 과도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해서, 좋은 사람을 만나 좋은 가정을 꾸리는 것과 같은 이상적인 삶의 단계들이 이야기되던 시대에서 내가 좋아하는 혹은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지,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각자의 고유성과 특별함을 이야기하는 시대. 어쩌면 내가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걸지도.

이십대 중반까지만 해도 견양의 삶을 지향하며 살았던 것 같다. 소위 모범적인 학생이기 위해 노력했다. 지각이나 결석은 아예 옵션에 없이 개근하는 학생이었고,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을 잘 치루고 어느 정도의 성적을 받는 학생이었고, 선생님이 하지 말라는 것들은 웬만하면 하지 않는 학생이었다. 이런 학창시절을 보내고 소위 좋은 대학 중 하나에 진학해서도 당일 아침까지 술을 퍼마셨어도 결강은 절대 하지 않는 학생이었고, 교수님의 강의를 모조리 흡수하겠다는 듯 수업 시간에 열심인 학생이었고, 과제를 하거나 시험을 볼 때 교수님이 좋아할만한 답안을 잘 맞춰쓰는 학생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정답을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이었던 것 같다.

불허복제의 삶으로 한순간에 넘어간 어떤 결정적인 계기 하나가 딱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꼽자면 2015년에 떠났던 7개월 간의 배낭여행이지 않을까. 물론 그간 견양의 삶을 살아내며 까시러운 텍이 붙은 옷을 입은듯한 이물감과 작은 것들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쌓여 조금씩 더 무겁게 느껴지는 버거움이 쌓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7개월 간 한국을 떠나 이베리아 반도와 중남미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다양한 삶의 모습을 접할 수 있었다.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저렇게도 살아갈 수 있구나,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배낭여행 이후 지금까지는 어쩌면 불허복제의 삶을 지향하며 살았던 것 같다. 세상이 당연하다고 하는 것들에, 견양의 삶에 ‘그게 정말 당연해? 그게 정말 정답이야? 아니 정답이 어떻게 하나 뿐이야?’하며 원래부터 갖고 있던 것인가 싶은 반골기질을 더이상 숨기지 않고 마구 드러냈다. 롤모델이나 레퍼런스가 거의 없다시피 하더라도 내 마음이 가는대로 더듬더듬 헤쳐나가왔다. 견양의 삶을 지향할 때보다 확실히 나로서 존재하는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다만 참고할 만한 것들이 너무 적었기에 ’이게 맞나? 저게 맞나?’하면서 불안해하고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했고 그게 나를 서서히 지치게 한 것 같다.

요즘은 차라리 누가 정답을 알려줬으면 좋겠기도 하고, 그런데 또 그 정답이 내 마음에 안 들면 하고 싶지 않을 것 같기도 해서 그냥 나만의 답을 만들어가는 삶이 편할 것 같기도 하고… 견양과 불허복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중이다. 물론 인생은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 둘 중 하나가 정답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어쩌면 인생은 견양과 불허복제를 적당히 오가야 혹은 인생의 시기마다 스스로에게 적절한 비율로 농도를 맞춰가야 한다는 것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는 견양이 더 필요할까, 불허복제가 더 필요할까. 골똘한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니 나무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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